대성당의 기본과 슈파이어 대성당
시기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거래의 증가와 도시들 사이의 경쟁은 건축적 생산물의 빠른 증가와 새로운 형태에 대한 실험을 이끌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석조 아치 천장(vault 아치에서 발달한 반원형 천장)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은 공간적이고 구조적이며 상징적인 심오함을 의미한다. 석조 아치 천장을 지지하기 위해, 측면 통로는 가마의 구조적 버팀목 역할을 하며, 건물 내부는 통로를 통해 아치와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3자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대성당(cathedral)이라는 단어는 교수의 의자를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로부터 유래했다. 이 단어를 건축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800년경이다. cathedral은 언어학적 의미에서 또한 주교의 의자를 위한 정교한 구성을 갖춘 장치이다. 바티칸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성 베드로 의자라고 불리는 의자를 포함해 여전히 고대의 몇몇 의자들이 남아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지어진 초기 교회 중 하나가 슈파이어 대성당(Speyer Cathedral)이다. 1040년경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아치와 함께 1137년경 완성되었다. 카롤링거와 오토 왕조의 건축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을 포기하고, 신랑의 경우 로마 송수로를 염두에 둔 듯 높은 아치가 연속되는 형태로 나타냈다. 꼭대기의 창문은 신랑으로 빛을 들였다. 더 중요한 것은 바닥에서부터 아치의 기단까지 올라가는 기둥이었다. 어떤 것은 바닥 기준으로 무려 32m의 높이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어떤 아치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교차점은 8각형의 타워로 나타났다. 형태에서 높이가 강조된 비율은 건축물이 더욱 압축되고 절제되어 보이도록 하고, 힐데스하임의 다른 비율이 보이는 형태과 비교해서 다른 시각적 효과를 갖도록 한다.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슈파이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바로 그 시기, 1050년경에 지어지기 시작한 프랑스 콩크(Conques)에 생트푸아 수도원 교회(Abbey Church of St.Foy)에서 놀랄 만한 새로운 발전이 나타났다.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길게 솟아오르는 반원형 둥근 천창의 신랑은 지붕으로 덮인 칸의 모습보다는 하나의 구조로서의 인상이 짙다. 양쪽의 높은 복도는 아치를 위한 버트레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또한 신랑의 가장 낮은 부분은 회랑의 입구와 건축물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러나 건축가들은 벽을 더욱 늘림으로써 바깥쪽으로 버트레스를 더 추가했다. 버트레스의 규모는 작았지만, 카롤링거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정의한 벽과 기둥 사이의 명확한 차이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벽은 더욱더 교각의 연속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슈파이어 대성당
슈파이어 대성당은 1030년 황제 콘라트 2세의 명령으로 기공되어 1060년 하인리히 4에 의해 헌당된 라틴십자플랜의 독일 로마네스크 건축을 대표하지는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교차부 후진(Apse) 양옆에 사각형의 탑이 있고 지하에는 묵직한 원주로 떠받친 석조 지하실(Crypt)이 있어 초기 로마네스크의 중후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슈파이어는 제국(Imperial)이란 의미이다.
신랑은 원래 평면 천장이었으나 1082년 이후 건축가 베놈에 의해 횡단 아치와 교차볼트가 걸쳐짐으로써 더욱 발전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보인다. 4개의 탑과 2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로마네스크 기념물 중의 하나이며, 건축 구조는 동서양의 영향이 완벽하게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슈파이어의 대성당은 시간의 흐름 속에 좌초된 돌로 만든 배처럼 라인강변의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다. 11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역대 황제의 묘소로 건설한 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최대 규모의 종교 건축물이다. 이것은 황제 권위의 상징으로 건설되었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건물의 평면이 라틴십자가 모양인 삼항식 성당이었다. 신랑보다 바닥이 높은 내진 뒤쪽에는 후진이 있고, 천장이 높고 내부가 넓은 지하 제실도 처음부터 있었다. 내진의 천장은 반 원통형 궁륭으로 덮여있고 신랑과 일강의 천장은 평평했으며, 측량의 천장만 교차궁륭으로 되어있었다. 신랑의 천장 높이가 자그마치 30m나 된다. 성당 내부의 천장은 반원형과 각형이 혼합된 각주 12기가 떠받치고 있어 상승감을 고조시킨다. 동쪽에 나란히 솟아 있는 탑도 콘라트 2세 때부터 있던 것이다. 다만 이 탑들은 나중에 개축되어 지금은 건설 당시보다 높아졌다. 그리고 서쪽 입구의 계단 모양으로 조각된 두께 6m의 벽체도 건설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하인리히 4세 때는 남쪽에 세례당과 성 에메람(St. Emmeram) 예배당이 세워지고, 호화로운 복합기둥머리로 성당 안을 장식하는 등 대규모 개축이 이루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삼항식 신랑을 석조 교차궁륭으로 덮은 것이다. 이것은 독일 최초의 대규모 석조 교차궁륭이었다. 그리고 후진도 새롭게 재건되었다. 특히 진찰 재건 공사 때는 외벽 위쪽을 소형 주당으로 둘러싸고 그 밑에는 장식용 아치를 만들었으며, 다시 아치 밑을 움푹 파는 등 외관에 많은 신경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