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감독으로 유명한 제임스 건이 DC 영화 제작부의 수장으로 올라서면서 기존 부진을 면치 못하던 DCEU를 DCU(DC 유니버스)로 개편함과 동시에 기존 DCEU 시리즈의 마무리, 혹은 소프트 리부트를 표명했는데요. 이러한 여파로 개봉 예정이었던 차기 DCEU 영화들(샤잠 2, 더 플래시, 블루비틀, 아쿠아맨 2)이 DCU로 편입되는 것인지, 이대로 시리즈에 종막을 고하는 것인지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올해 3월에 개봉했던 샤잠 2는 흥행 실패와 배우의 SNS 발언으로 사실상 DCU 편입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개봉한 더 플래시는 어떨까요? 어제 조기 개봉한 '더 플래시'를 보고 추측해본 결과, DCEU의 개편을 목적으로 제작한 영화인 만큼 세계관 설정을 워낙 영리하게 풀어내서, 흥행 성적에 따라 DCU에 매우 유연하게 편입될 수도, 편입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의 사정이 다수 포함된 DCEU에서 DCU로 변모해가는 과정은 추후 작성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이번 시간에는 영화 '더 플래시'를 본 DC 팬이나 매니아라면 보면서 친숙함을 느끼거나 감탄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장면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유서 깊은 DC 팬이 아니어서 여러 시퀀스를 보면서도 '이게 무슨 뜬금 없는 장면이지?'라고 생각할 사람들을 위해 이번 영화에서 오마쥬하거나 기존 DC 영화를 활용한 부분에 대해 하나 하나 짚어보겠습니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 지금부터 강스포 주의 ※
1. 벤 에플렉 배트맨의 오토바이 추격신 :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2008),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2022)
더 플래시 영화 초반, 기존 DCEU 세계관에서 플래시(에즈라 밀러 분)는 알프레드(제레미 아이언스 분)의 연락을 받아 배트맨(벤 에플렉 분)과 함께 각각 사건을 해결하게 됩니다. 이 때 배트맨은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한 바이러스를 탈취한 팔코네 일당의 트럭을 추격하는데요.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전을 벌이는 시퀀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작으로 불리는 '다크나이트'의 오토바이 시퀀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팔코네 일당은 추격하는 배트맨을 따돌리기 위해 유조트럭을 폭파시키지만 배트맨은 트럭의 화염을 뚫고 추격을 이어갑니
다. 이 때의 모습은 2022년 개봉한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의 유명한 추격 신을 떠올리게 하죠. 이렇듯 이 영화는 시작부터 기존 DCEU 작품과 이전 DC 영화까지 오마주하며 이 영화가 DC 팬과 매니아를 매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벤 에플렉 배트맨의 멋진 액션을 볼 수 있는 점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2. DCEU의 창시자 잭 스나이더에 대한 존중, 화려한 DCEU 카메오
잭 스나이더 감독에 관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DCEU 영화 시리즈인 '배트맨 대 슈퍼맨'의 악평과 흥행 부진, '저스티스 리그' 촬영 도중 딸의 안타까운 사고로 그는 감독직에서 하차하며 여러모로 DCEU와 좋지 않게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어벤져스'의 감독이었던 조스 웨던이 영화를 마무리하고 개봉했지만 잭 스나이더가 만들어 왔던 DCEU의 색채와 너무 이질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하찮은 유머, 빈약한 비중의 플래시와 사이보그, 슈퍼맨의 원맨쇼 등 전체적으로 허술한 전개 탓에 영화의 퀄리티와 흥행 결과는 매우 처참했고, DCEU는 더욱 가파른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
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잭 스나이더가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이 기획했던 '저스티스 리그'는 조스 웨던이 마무리한 버전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렸고, 출연 배우들과 팬들은 SNS 해시태그를 통해 '스나이더 컷'이라고 불리는 잭 스나이더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 공개를 몇 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 스나이더 컷 공개는 DC 영화 제작을 독점하고 있는 워너 브라더스사의 스트리밍 서비스 개시의 마중물로 활용되며 기적적으로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고, 무려 4시간에 달하는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어 기존 영화와 확실히 다른 퀄리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이보그와 플래시가 스토리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특히 플래시는 시간을 역행하는 능력까지 선보이며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더욱 웅장하게 장식했습니다. 잭 스나이더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는 공개와 동시에 큰 화제를 일으키며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DCEU 팬들은 멋진 영화에 감탄했으나 정식 개봉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용 콘텐츠이기에 이 영화에는 지속성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이미 조스 웨던 저스티스 리그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관을 리부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팬 서비스를 위한 영화 정도로 취급하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는데요. 더 플래시의 감독 안드레스 무시에티는 이번 영화에서 과감하게 잭 스나이더 버전의 설정을 활용합니다. 플래시가 브루스 웨인(벤 에플렉)과 시간 역행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에서 브루스 웨인은 플래시에게 "예전에 경험해봤다던 시간 역행?"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이 바로 잭 스나이더의 설정을 이어가야만 언급이 가능한 대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잭 스나이더 버전의 설정을 잇는 다른 장면도 있습니다. 플래시가 짝사랑하는 여인 아이리스 웨스트(키어시 클레먼스 분)와 우연히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이리스는 플래시에게 우리 본 적이 있지 않냐며 플래시를 얼핏 기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잭 스나이더 버전의 영화에만 있는 내용으로, 당시 플래시는 교통사고로 죽을 위기에 처한 아이리스를 구하고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데, 이 역시 조스 웨던 버전에서는 삭제된 내용이어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사를 넣었습니다. 감독은 이 두 장면을 통해 '더 플래시'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이어가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대사나 장면들을 통해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은 잭 스나이더의 비전을 영화에 적용했음을 알렸고, 동시에 기존 DCEU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당연히 나와야 하는 연인 아이리스 웨스트는 물론이고 영화 초반 뉴스 화면을 통해 헨리 카빌로 보이는 슈퍼맨의 뒷모습, 추격전 후 위험에 빠진 배트맨을 구하는 원더우먼(갤 가돗 분)을 볼 수 있습니다. 플래시가 멀티버스를 이동할 때는 영화 저스티스 리그 당시의 헨리 카빌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사이보그(레이 피셔 분)는 워너와 배우의 불화로 언급 정도에 그칩니다. 다크 플래시에게 공격당해 다른 멀티버스에 빠진 이후에는 아쿠아맨의 아버지 토마스 커리(테무에라 모리슨 분)는 물론이고,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 분), 파오라(안톄 트라우에 분)까지 등장하며 DCEU의 첫 시작을 연 작품인 '맨 오브 스틸'(2013)의 스토리까지 적극 활용합니다. 마지막 쿠키에서는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 분)까지 등장하며 사이보그를 제외한 DCEU 저스티스 리그 멤버가 한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데요. 샤잠, 블랙 아담,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등장이나 언급이 없는 점은 아쉬우나 그만큼 메인 저스티스 리그 멤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모던 에이지 배트맨의 등장과 추억 소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 비긴즈로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를 시작하기 이전 개봉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두 편(1989, 1992)과 배트맨 포에버(1995), 배트맨 앤 로빈(1997)까지 이 영화들을 일컬어 모던 에이지 배트맨 시리즈라고 부릅니다. 배트맨 시리즈의 팬이라면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영화에서 호연을 펼치며 배트맨의 상징이 된 마이클 키튼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플래시가 멀티버스에서 이탈해 떨어진 세계는 고담을 평화롭게 만들고 은퇴한 노년의 배트맨으로 마이클 키튼이 등장하는데요. 흔히 궁금해했을 마이클 키튼 배트맨의 노년을 보여주며 웬지 모를 뭉클함에 빠지게도 하는데 여기에서 깜짝 아이템이 등장합니다. 바로 배트맨 1편에서 조커(잭 니콜슨 분)가 죽으면서 남긴 웃음 주머니입니다.
이외에도 추억이 떠오르게끔 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배트윙이 날며 달을 배경으로 만드는 배트시그널 장면, 배트맨이 갈고리를 사용할 때 능력이 사라진 배리 앨런(플래시/에즈라 밀러 분)이 이상한 포즈로 안기는 장면, 배트맨이 카라 조엘(사샤 카예 분), 배리 앨런들과 탈출하기 위해 몸무게를 묻는 장면, 예고편에 등장한 "Let's get nuts!" 등의 대사 모두 배트맨 1편의 오마주입니다.
팀 버튼 버전의 배트케이브, 배트모빌, 배트윙을 그대로 재현해내며 추억을 소환한 이 영화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활용한 것 뿐만 아니라 응용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 다양한 수트를 입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수트도 잠깐이지만 확실히 등장하는데요. 배트맨 대 슈퍼맨(2016)에서 아포칼립스 예지몽을 꾼 배트맨이 입었던 복장 컨셉을 적용한 듯한 수트까지 깜짝 등장하며 팬들이 한 번쯤 상상해봤을 만한 장면들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브루스 웨인을 만난 플래시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플래시였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바뀌어 있는 세계였던 거죠. 마지막에 만난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벤 에플렉이 아닌, 조지 클루니였습니다. 조지 클루니는 모던 에이지 시리즈인 배트맨 앤 로빈(1997)에서 배트맨을 연기했는데, 이 영화는 젖꼭지가 달린 수트와 배트맨 신용카드로 여러 팬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조지 클루니 본인이 흑역사라고 인정하기도 했는데, 다시 브루스 웨인을 연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움을 살 만 합니다.
4. 살짝 엔드게임이 떠오르는 DC 작품 인물들의 출연
두 배리 앨런의 충돌과 다크 플래시의 난입으로 멀티버스가 붕괴되는 장면에서 감독은 DC에 존재하는 모든 유니버스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차원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죽 나열해 보겠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면 이 캐릭터들의 목록이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 배트맨(1966) : 애덤 웨스트 분
- 슈퍼맨 시리즈(1978,1980,1983,1987) : 슈퍼맨(크리스토퍼 리브 분), 슈퍼걸(헬렌 슬레이터 분)
- 플래시 제이 게릭(1990) : 존 웨슬리 쉬프 분
- 팀 버튼 배트맨과 함께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슈퍼맨(니콜라스 케이지 분)
이 인물들이 한꺼번에 모여 활약하는 건 아니고 각자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모습들이 그려지거나 멀티버스의 충돌을 확인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가장 놀라운 건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이 영화에 구현되었다는 것인데요. 이 글에 활용한 사진과 같은 스타일로 등장해서 거대 거미 로봇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존 슈퍼맨의 이미지와 다른 야성적인 마초 이미지의 슈퍼맨으로서의 색다른 위용이 크게 느껴지면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도 그럴싸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해당 장면에서 컴퓨터 그래픽 티가 많이 난다는 지적도 많은 상황이지만, DC 캐릭터 실사화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느낌이 들어 이런 시퀀스가 구현된 것만으로도 팬들에게 큰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화 '더 플래시'가 활용한 DC의 유서 깊은 유산과 레퍼런스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러한 레퍼런스뿐만 아니라 백 투 더 퓨처(1987), 풋 루즈(1984) 등의 캐스팅 관련 비화 등 깨알같은 팩트들이 많이 꼬여 있어 해당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 잠깐의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 여부에 주목이 되는 가운데, 플래시가 DCU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혹은 배제되어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DCU만의 다른 플래시가 등장하게 될지 궁금해지네요. 오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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