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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노르만이 대성당 양식에 미친 영향

by 프리아키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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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이 우세를 잡아가던 9세기경, 911년도에 카를로스 3세가 노르만 소유의 도시 루앙(Rouen) 근처에서 그들의 왕이 되었다. 놀라울 만한 적응력을 가진 노르만족은 그들의 종교를 버리고 지역 관습과 언어를 흡수했다. 그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전을 따랐으며, 캉(Caen)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노르만 양식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노르웨이의 장식적 모티프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시실리아의 노르만족으로부터 영국, 프랑스로 가져온 이슬람의 영향 또한 그려냈다.  
 
다양한 흐름 속에서 노르만족은 헤이스팅스 전쟁 후에 이탈리아의 남쪽인 시실리아와 북아프리카, 영국을 정복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영국 지역의 전체 종교, 상업, 정치를 변화시켰지만 그들의 지배 권역이 영국에서 북프랑스, 남이탈리아, 시실리아로 확산하면서 노르만족의 교역소(clearinghouse)와 분산된 많은 고전들을 연결하는 작업이 문화적 트렌드가 되었다. 영국 대성당에서 일하던 이슬람 석공들의 영향 역시 여전했다.

 

그들은 섹슨족(Saxon)의 지리학에 기초해 치구의 중심에 그들의 통치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성을 지어 마을과 큰 농작지 등의 토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성이 일반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산등성이에 있는 독일과는 다르게, 산이 두드러지지 않는 지형적 특성을 가진 영국은 성이 지역의 중심에 위치했다. 도시의 시장들이 만들어졌고 국제적으로 호화로운 상품들을 거래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400개에서 500개 사이의 새로운 마을들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환경은 사실상 산업혁명까지 바뀌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몇몇 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도시 중심의 패턴이 남아있다.

 

노르만족은 강력한 상업 사회뿐만 아니라 왕위 개념의 변화 또한 가져왔다. 로저는 기독교의 왕족 대리인 역할을 했다. 영국에 지어진 소규모의 섹슨족 교회들은 더 이상 이러한 큰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사라졌고 노르만족은 교회가 사라진 자리에 주교관할권의 영향력이 드러나도록 호화로운 대성당을 계획했다. 건축가들과 석공들은 유럽에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베네딕도회(Benedictines), 아우구스티노 수도회(Augustinians), 시토회(Cistercians), 클뤼니(Cluniacs), 카르투시오회(Carthusians)와 같은 유럽의 수도자들과 함께 왔다. 유럽의 수도자들은 그들이 잘 가꾼 농장을 통해 시장에서 이익을 얻기도 했던 경제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그 예시로 시토회는 경작과 더불어 대규모의 양 사육을 병행했다. 12세기 말에, 600여 개의 다양한 관습을 가진 새로운 수도 기관이 지어졌다.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

새로운 주교직이 생기면서 캔터베리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다. 왜냐하면 주교가 왕의 부섭정이었기 때문이다. 1117년에 화재로 인해 성가대석이 무너졌을 때 건축가들은 교회 길이의 두 배 정도 되는 새로운 성가대석과 장로회관을 세웠다. 새로 만든 부분은 더욱 신성한 장소처럼 보이게끔 구역을 구획하는 계단과 함께 동쪽의 더 높은 곳에 있다. 이 프로젝트는 영국이 얼마나 프랑스의 건설 기술을 잘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6개로 분열된 둥근 천장(vault), 그리고 다른 고딕 사조의 특징들과 신랑(nave) 등의 요소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신랑(nave)은 14세기 후반에 다시 지어졌다. 다른 신성한 장소 중 영국 처치 하우스(church house 영국 교회의 본부)는 원래 건물의 동쪽 끝에 있는 둥근 채플(chapel)의 중앙에 놓여있다.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

 

이 성당은 특히 높은 수준의 석공 기술처럼 건축적 요소를 확인하기 좋다. 더럼 대성당은 영국의 장식 전통과 노르만의 건축적 기술이 혼합된 특유의 앵글로 노르만 스타일을 보여준다. 성가대석과 3개의 복도를 포함한 교회의 신랑은 1093-1039에 지어졌지만 1220년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인 고상함이 보이면서도 여기에서 신선한 것은 벽의 구조적인 형태이다. 노르만 건축의 특징은 속이 가득 찬 벽에 열린 아치의 골격을 적용하는 것이다. 아치를 벽의 중지만이 아닌 규칙적으로 반복적인 골조로 사용해 기둥으로 적용했다. 더럼 대성당은 현대 기준으로 고딕 양식의 선구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고딕의 필수요소인 리브 볼트와 뾰족한 아치 때문이다. 건물 서쪽 정면은 소위 갈릴리 채플(Galilee Chapel)이라 불리는 5개의 나란한 (다른 교각으로 나뉘지 않는 세로로 아케이드 된 벽으로 된) 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형태는 이슬람 모스크에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지중해에서 들여온 타 양식과의 교류를 추측해볼 수 있다.

 


세파로 성당(Cefalu Cathedral)

 

1060년 로저 1세(Roger d'Hauteville)가 시실리아(Sicily)를 점령했을 때, 9세기 후반부터 영향을 끼쳐온 아랍 문화를 발견했다. 노르만은 무슬림의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개혁들을 그들을 지휘부, 심지어 군대에까지 적용시켰다. 이내 이탈리아의 풀리아(Apulia), 카푸아(Capua), 시실리아(Sicily)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의 북부 지역이 노르만의 통치하에 들어왔다. 특별히 중요한 곳은 메시나(Messina)와 보스포루스 해협 무역로의 장악이었다. 첫 번째 교회는 세파루(Cefalu)에 세워졌다. 그 교회는 한쪽 측면에 복도가 있는 신도석과 목조 천장 그리고 동쪽에 거대한 트랜셉트(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까지, 전형적인 초기 노르만 양식을 따랐다. 무거운 느낌의 어두운 건물이었다. 몬레알레(Monreale)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바(Santa Maria Nova)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앱스(apes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 장식과 한데 어우러진 아치 그리고 테라코타 장식에서 이슬람의 영향이 확실히 드러난다.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에 있는 대모스크(The Great Mosque)와 톨레도(Toledo)에 있는 밥 마룸 모스크(Bab Marum Mosque)처럼 서로 맞물리는 형식의 아치가 보인다. 또한 벽을 뒤덮은 매우 아름다운 모자이크에서 비잔틴의 영향도 보인다. 종합적인 문체에서 노르만족이 점령했던 서부 이탈리아의 방식도 나타난다. 아말피(Amalfi)는 9~11세기 사이에 제노바, 베네치아, 파리와 경쟁하는 해양 국가가 되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아말피는 마디아(Mahdia), 캐루안(Kairuan),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베이루트(Beirut), 예루살렘(Jerusalem), 안티오키아(Antioch), 그리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무역 대리점이 있었다. 아말피 대성당에는 다양한 문화적 확장을 거쳤는데 그중에는 이슬람의 모티프에 영향을 받은 낙원의 회랑(Cloister of paradise)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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