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이전의 이집트
초창기 북아프리카는 한때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는 광활하고 비옥한 숲과 목초지의 땅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극적인 온난화가 전 지구에 영향을 미치면서 북아프리카의 기후를 바꾸었고, 끊임없는 모래의 유입으로 우리가 지금 사하라 사막이라고 부르는 곳이 생겼다. 사람들은 모로코, 스페인을 넘어 서쪽으로 또는 나일강의 강기슭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기원전 4세기 이집트에는 촌락들이 마을로 성장하고, 에게 섬들과 나일강을 통해 무역 활동이 진행되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경우와 달리, 나일강의 인구 밀집이 당시 기존의 사회시스템을 초월하는 모습은 몇몇 예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그 지역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을 신성화하며 그들의 힘과 권위를 보호하고 지배 권력을 고착화한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종교가 유라시아나 지중해의 많은 지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종교의 형태인 땅을 소중히 하고 대지의 신을 믿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집트 종교는 처음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었다.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상류층, 지도층에 해당하는 사회 엘리트만을 위한 종교였다. 공동체의 운명을 위한 사회의 민담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영웅적인 왕의 신화 이야기도 없었다. 이런 경우는 종교가 사회에서 광범위한 역할을 시작한 신 왕조(1540-1069 BC) 시기 뿐이었다. 이집트에 존재하는 사회규율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또다른 요인은 10월 중순 나일강 유역에서 곡물을 수확하는 사이클이었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이 평원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물과 음식의 축복과는 별개로, 이집트인들에게는 땅에 묻는 것, 매장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삶과 죽음, 강, 그리고 모래의 산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신성한 통치관의 신화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는 왕권통치 이전부터 있었던 미림(Merida)이라고 하는 지역인데, 카이로의 북쪽 50킬로미터와 나일강 삼각주의 서쪽에 걸쳐 있다. 그것은 기원전 6세기경 곡물 사일로가 땅에 묻혀 있는 상태의 오두막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체들은 마을 밖에 조성한 공동묘지의 얕은 구덩이에 놓였다. 무덤과도 같은 구덩이에는 그릇과 흙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함께 놓였다.
우상과 더불어, 몇몇은 화장 준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릇과 벽화들은 미적인 면에서 어떻게 보아도 이집트의 특징을 잘 드러내었다. 부드러운 표면과 추상적인 형태, 그리고 영웅적인 역동성까지도 말이다.
기원전 3200년경쯤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테베스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중요한 초기 도시 아비도스(Abydos)에 위치한 무덤은 매장하는 묘지의 개념이 나타난 것을 보여준다. 길이 10미터 정도 규모의 직사각형 형태를 띠는 구덩이로 구성되어있고, 그 너비는 5미터, 깊이가 1.5미터이다. 이 무덤은 작은 언덕을 조성하기 위해 목재, 진흙, 그리고 모래를 사용했다. 무덤 내부의 방은 문처럼 뚫린 작은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몇몇 방에는 석조로 된 병과 신을 위한 다른 부장품이 있었다. 무덤 내부 한 곳의 벽에는 배, 사냥, 낚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중 한 사냥꾼이 다가오는 두 사자에게 둔기를 휘두르는 장면이 있다.
이 무덤의 디자인과 장식은 마스터하(mastaba)의 발전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랍어로 “은행”이란 의미) 무덤 중에서 가장 웅장한 곳은 멤피스 바로 바깥에 있는 호를 아바(Hor Aba) 무덤이다. 몇몇 사람들은 벽의 복잡한 틈새가 나무와 갈대 벽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서 가까운 동쪽 지역의 사람들이나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땅을 파면 나오는 5개의 중심 방들은 무덤으로 추측된다. 3세기에 지어졌던 마스터하 뱃 샬럿(mastaba Bet Challat)는 아비도스 북쪽에 위치하며 45~85미터 너비, 8미터 높이 규모로 측정된다. 무덤은 여러 기능을 지닌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땅속 깊숙이 위치하고, 긴 복도에 걸쳐 놓여있다.
이집트 문화의 초창기를 살펴보면, 종교적 행사가 종교의 목적 및 영향력의 차이에 의해 사회 전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중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중국은 이런 이유로 사원 건축이 있었지만 이집트에는 이런 건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종교는 대신 죽음이라는 미지의 현상을 대비하기 위한, 지도자들의 삶과 죽음의 초안으로서 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집트 사회에서 종교의 위치는 중국과 인도의 경우보다 더욱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목적은 이들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다. 중국인들은 가족 기억의 전래를 목적으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사원을 차린다. 집의 성지와 토지의 둔덕에 다소 유실되기 쉬운 목재로 사원을 짓는 것이다. 반면 이집트에서는 죽음이란 통치자만 기릴 수 있는 엄숙한 것으로, 장엄하게 떠오르는 영혼과 편안한 삶의 요소들이 있는 집을 묘사하기 위해 특별하게 건설된 가정적인 공간들로 구성된 무덤만이 지어질 수 있었다. 그 집에는,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고, 먹고, 마시는지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 모두 담겨 있었다. 현재와 과거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기 시작한 이래로. 하지만 “집”은 방정식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집”을 풍경의 요소, 조형적인 영역으로 접근하는 것은 본질적인 구조의 바깥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건축가의 일은, 본질적으로 통치자의 죽음을 내부와 외부 형태의 조율을 통해 통합적으로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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