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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고대 건축 영향 요소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도시

by 프리아키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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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중국, 이집트는 지리학적으로 그들의 인류 문명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히 성장했고, 그 위치에서 그들의 힘을 비축했다. 중국은 히말라야 너머에서 수입된 금속이나 소금에 의존하지 않았다. 인더스강 협곡 역시 비교적 자급 자족이 가능했다. 이집트인들은 에게 섬이나 남쪽 누비아 섬에서 금속을 수입해오는 등 다소 교역에 의존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여건에서도, 몇백 년 동안 외부 침입이나 영향력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었다. 기원전 4000년경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지역에는 높은 고지대에 걸쳐 광활한 마을 네트워크가 발달하고 있었다. 거주자들은 이 거친 협곡을 곡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 정도로 몇 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에 의해 구획된 지역이다. 당시 이 지역의 기후는 꽤나 시원해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협곡이 현재의 사막과는 많이 달랐다. 이 지역의 고지대는 스텝과 사바나 기후의 중간지대로 염소, 사슴, 여우 등이 사는 숲들이 있었다. 농부들은 협곡에서 일하지만, 마을 공동체는 좀 더 요새로서 방어할 수 있는 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나 인도와는 달리 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두 가지의 경제 원천을 가지고 있었는데,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평원, 금과 구리를 캐낼 수 있는 아나톨리아 산의 광맥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 두 가지의 경제 원천 덕분에 풍요로움을 유지했다. 이러한 이점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기원전 6000년부터 2500년 사이 가장 중요한 정착지들은 자그로스 산의 측면을 우회하며 페르시아만의 북쪽 끝자락으로 둘러싸인 농업 습지 지역의 바로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서이라크의 남부 모술지역인 텔 하수나(Tell Hassuna), 북서쪽 1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강 위의 언덕 텔 마흐잘리야(Tell Maghzaliyah), 이란의 간지다 레와 자모와 사마라 근처의 티그리스 강둑의 왼쪽 텔 이소완(Tell Es-Saw wan) 등이 있다.

초창기에, 이 정착지들은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실질적인 공동체로 자라난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주요 건물 재료는 갈대를 섞은 진흙으로 다양한 높이의 벽을 구현하기 위한 수평 코스가 적용되어 있다. 집의 벽들은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 벌집 모양으로 구성했다. 집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방으로 구성되었고, 한 면이 평균 1.5미터에서 2미터의 길이로 측정된다. 간 다르(Gan Dare)에서, 고고학자들은 야생 양의 두개골이 붙어있는 플라스터를 바른 벽에서 안토니아(Antonia)에 있는 카탈 후육(Catal Huyuk)의 금과 유사한 틈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석고와 진흙으로 덮인 참나무 가지와 갈대로 연결된 보가 수평 지붕을 받치고 있다.

집들은 단순히 안식처 이상의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내부 벽의 몇몇은 석고 플라스터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석고 플라스터들은 기원전 7000년부터 발전되어온 양식으로 이 지역의 건축 양식의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북쪽의 광활한 석조 노출 방식을 통해, 그 당시 석재가 채굴된 후 쉽게 운송할 수 있도록 하얀 가루로 태워진 정황을 알 수 있다. 이 건축 재료를 이 지역에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역을 통해 상호 거래하기도 했다. 공예품과 도자기, 건축자재, 그리고 금속 제품의 발달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공예 역량의 발전과 해당 지역의 대도시화의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 하수나(Hassuna) 문명은 풍부한 곡물을 주변 지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유라시아의 주요한 구리 생산 지역은 카스피안 해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와 발칸반도의 흑해 주위까지 뻗어 있었다. 이 지역의 광산들은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사람의 손이 닿았다. 흑해 연안 바르나(Varna)의 몇몇 무덤이 기원전 4500년경에 발견되었고, 이 무덤의 탐사를 통해 당시 마을 사람들이 금속을 사용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무덤에서 주석, 보석과 조개껍데기로 만든 물건, 구리 또는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뿔 달린 황소, 황금 등의 여러 장식품을 비롯해 여러 천연자원들을 발굴했다. 또 다른 북쪽의 공동체에서는 소금을 생산했는데, 소금은 오스트리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문명 초기부터 채굴되었다. 사람들은 소금이 할슈타트(Halstadt) 문명을 부유하게 한 잘츠부르크(Salzburg 글자 그대로 “소금산”)에서만 채굴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원전 25000년 이전으로 추측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구운 점토 흔적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10000년 전에는 바구니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부터 카스피해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초승달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종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지역을 도시 문명의 시초로 생각하지만, 곡물의 생산과 금속의 생산은 상호적으로 거래되는 수단이기도 했기에 너무 국한된 시각으로 문명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아나톨리아 중심의 카탈 후육은 금속 거래 도시의 중심이었다. 3000명 남짓한 인구수로 추정되고, 기원전 740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시대에 가장 큰 도시였다. 거기서 발견된 금속 물건은 동부 주위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지역사회와 교역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특히 화산 유리(흑요석)는 물물교환 화폐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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