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500년경 쯤 사람들은 발루치스탄 언덕에서 내려와서 남아시아 대륙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강 마을에 정착했다. 인더스강은 남아시아의 주요한 강 중 하나이다. 고대 산스크리트에서 인더스강은 신주로 불리었다. 이들의 언어 기준으로 신주는 힌두가 되었고 그리스에서는 인더스라 불렀다. 이 단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사용했다.
인더스강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멜루하 문명과 유사하게 부른 듯 하다. 아라비아만을 통해 선박으로 거래하거나 북부 육로로 교역한 동시대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넓은 지역의 인류 및 신화의 형상이 있는 수천개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이 당시 시민에게 나누어졌을 것이라 추측했다. 발견된 유물에는 무역 네트워크를 위해 아라비아 바다, 벨루하 지역에서 온 선박를 구분하는 여러 개의 표가 적혀 있었다. 배는 벽돌과 악세서리, 금속 그리고 돌들을 실어 날랐다. 그 돌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채광된 보석이었다. 인더스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배가 인더스로 무엇을 날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아시아 중심부, 동인도 그리고 아라비아해는 모두 서로 연관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여전히 연관되어 있는 지역들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역사적인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인더스강을 따라 수백 개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마을들은 후에 사라스바티라 불리는, 지금은 사라진 강 내륙에 모여 있었다. 가가 하크라 지역의 내륙의 삼각 역 충적층 퇴적 토양 재배는 농작물이 풍부하게 생산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가가 하크라 지역이 기원전 1500년부터 200~300년의 기간에 걸쳐 메마른 상황은 전례에 없던 큰 재앙이었고 모든 문명의 종말과도 같았다. 당시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 중 다수가 갠지스강 동쪽으로 갔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쪽으로 갔을 수도 있고 아시리아보다 멀리 갔을 수도 있다.
어떤 의미로 볼 때, 인더스 가가 하크라 문명이 최초의 도시 문명이다. 인더스 강을 기반으로 몇몇 도시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했고 단위가 통일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작물의 수확 여분, 구슬과 같은 공예품을 활용한 교역으로 정치 기반을 다졌다. 기초적인 무기 외에는 찾기 힘든 것을 보아 메소포타미아처럼 무력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크고 작은 집들을 통해 사회 계층 분리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중국처럼 왕이 중앙 집권한 흔적은 거의 없다. 큰 성이나 궁궐도 발견되지 않았고 도시에서 발견된 수 천개의 테라코타 우표에서도 상류층의 인물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문명화를 상징하는 건축 문화 역시 거대한 사원이나 피라미드를 짓지 않았다. 그들의 테라코타 우표에서 그들이 계층의 분리가 아닌 신화적인 체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유니콘 같은 신성한 동물들이 많이 있고 신화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 인물은 머리에 황소의 뿔을 머리에 쓰고 연꽃 모양의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인데 모든 동물의 숭배를 받는다. 이 시기에는 풍요과 출산에 대한 조각품 제작이 급증했다. 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이 중앙 집권 형태의 사법 기관을 만들지 않고 어떻게 거대한 정치조직을 형성했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인더스 가가 하크라 내 사회 조직의 두 가지 기본 요소는 도시 계획과 수력 기술이었다. 큰 도시로 알려진 모헨조다로는 지하의 큰 공중화장실부터 작은 집에 있는 화장실 배수까지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복합적 배수 체계가 있었고, 이는 수만 개의 벽돌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인더스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모헨조다로의 주 역할은 도전적인 기술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인더스는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 얼음과 토사 댐을 이용했지만 결국 그것이 거대한 홍수를 초래했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 모헨조다로에 있는 두 채의 거대한 건물은 많은 양의 물을 한 번에 배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주요 거리 하부에서 배수 기능을 처리할 수 있게 되어있었고 임시 탱크를 두어 청소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돌라비라의 수력 기술은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건조한 지역의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홍수 때에도 물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오랜 건기를 버텨낼 만큼 충분한 물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그들은 기발한 전략을 세웠다. 강 하류에 댐을 지어서 물을 탱크로 끌어들이고 홍수가 났을 때는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흐르게 두는 것이었다. 항구 도시 로탈에서는 선박을 위해 큰 삼각형 탱크로 수문을 열어 물을 흐르게 했다. 인더스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은 그들의 성향처럼 내성적인 방향으로 구축되었다. 대로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그 다음으로 큰 거리에도 아무런 집이 없었다. 대로로부터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오로지 작은 길을 따라서만 집에 갈 수 있었고 집은 주로 이층 규모로 뜰을 보유한 큰 집이었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출입문을 이용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 적당한 수의 방이 있었고 공간 중 가장 큰 것은 목욕탕과 화장실이었다.
남북과 동서를 잇는 거리의 주요 교차로에 위치한 모헨조다로의 거대한 목욕탕은 도시의 사회적 중심 공간이었다. 가로 12미터 세로 7미터 깊이 3미터 규모의 거대한 욕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대칭적인 계단을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목욕탕은 좁고 깊은 수로로 둘러싸여 있었고 욕탕 모서리에 있는 배수구가 물을 높이가 낮은 주변으로 나가게 했다. 구운 벽돌로 욕탕을 만들었고 역청으로 방수했다. 목욕탕은 콜로네이드로 둘러싸여 있었고 욕실 뒤에는 다양한 크기의 방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이층이었으며 골조는 나무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중앙에 있는 욕탕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출입은 서쪽으로만 가능했다. 출입문 주변에서 중요한 인물을 기념하는 항아리와 재가 함께 발견되었다. 사회적 의식이 그곳에서 행해졌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거대한 목욕탕의 존재가 물의 우세함을 보여주며 그들의 이데올로기에서 물을 활용한 목욕이 우세함을 보여준다. 목욕탕 서쪽에는 같은 레벨로 연결되어 있도록 지어진 좁은 통풍구가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것이 거대한 곡물 저장고라고 생각했지만 근래에 들어 이것이 보통의 창고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낮은 부영역으로 내려가는 가장 큰 계단은 서쪽에 있는 이 건물의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강이 말라가면서 도시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유실의 과정은 평범했다. 예를 들어 그 거대한 목욕탕은 처음에는 작업장으로 사용되었다가 나중에 자연스레 사라졌다. 남쪽의 작은 도시들은 사실 인더스의 몰락으로 인해 더 큰 도시로 성장했지만 끝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더스 사람들을 살게 했던 문명이 끝내는 인더스 사람들을 사라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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