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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400년대 유럽의 상황과 바실리카

by 프리아키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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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의 출현


326년, 크리스트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을 때, 이것이 이교도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전통이 이어져왔더라도 그간 잃어왔던 진짜 종교적 관습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신에 더욱 밀접한 관계를 기조로 하며 헬레니즘의 몇몇 대안적 종교 중 하나로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임종에서 거대한 흐름이 바뀌었다. 4세기의 일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크리스트교 개종으로 인해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임종 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대신관인 막시무스는 누가 황제가 되든지 간에 그가 크리스트교와 교회의 대표 또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와 교황으로 대비되는 정치와 종교의 양립이 황제 중심의 한 줄기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대 막시무스의 생각은 매우 도전적인 의견이다. 이것은 교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습적이고 관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종교 건축이 사원 건축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리스트교 건축 초기의 폭넓고 다양한 해결책들은 건축과 예배식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찾기 위한 단서였다.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 house-churches(개인의 집에서 개최하는 신앙 집회)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때, 이러한 추세는 다양한 형태들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그들의 양립 가능성,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예배식의 요구에 따라 가속화되었다. 로마 건축에서 볼 때는 크리스트교적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었다. 황제의 포럼이 사라지게 되었고 사원들은 건물 재료 수급을 위해 개조되었다. 벽들은 교회를 짓기 위한 기둥 사이로 쓰였다. 로마 건물의 석재들은 큰 가마에 녹여져 회반죽을 위한 석회로 만들었다. 이런 흐름에도 이교도 의식이 38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황제들은 서서히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성소들이 갑자기 파괴되었고 그 잔해는 비교적 작은 교회를 다시 디자인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실리카

바실리카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시장, 관공서, 지붕이 있는 야외극장 등 상업적 용도보다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점차 장방형의 회당이라는 특정 형태를 취한 건축을 지칭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며 그리스 신전보다 내부 공간이 넓다. 고대 지중해 지방에서 바실리카는 주로 왕궁, 거래 시장 등의 공공건축에 이용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재판이나 시민의 집회장으로서 대규모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제정기부터 고대 말기에 걸쳐서 로마시의 중심 포럼에는 시저, 트라야누스 황제, 막센티우스 황제 등에 의해서 바실리카가 조영되었다. 바실리카라는 명칭도 ‘왕족의, 왕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이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바실리카는 폼페이에 있다. 

그러나 최초의 바실리카라고 알려진 것은 기원전 2세기 초 로마에 건설된 건물들로서, 중앙의 넓은 복도를 열주당(기둥이 연속적으로 나열된 형태)으로 둘러싸고 천장을 높게 해서 창문을 달았고, 개방된 주량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포를 로마노가 이에 해당한다. 바실리카의 한쪽 끝 혹은 양쪽 끝에는 집정관이나 제정자가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해당하는 앱스가 있다. 이런 형태의 바실리카는 로마 제정 초기에 지중해 중심과 동부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1세기 후반 로마의 궁정에서 볼 수 있는 긴 측량과 동쪽 끝에 앱스가 있는 집회실을 일컬어 바실리카라고 하기도 했고, 아무 장식도 없는 장방형의 집회장을 포함해서 여러 형태의 공공건물을 지칭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한 312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크리스트교 의식을 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이 성 요한 라테란이다.)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때까지 개인의 주택에서 행해졌던 신도의 예배, 전례, 집회의 장으로서 바실리카식 건축이 이용되었고, 로마 시내를 비롯해 로마제국령의 각지에 바실리카식 교회당이 계속 세워졌다. 또한 기존의 바실리카가 교회당으로 개장되기도 하였는데 4세기에 창건된 것도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역사가 오래되거나 위대한 성인 또는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되어 국제적으로 예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는 특정 교회 건물에 바실리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 총대주교를 위해 대제단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와 특별사면권 등 특별한 권한을 지닌다. 한편 4세기경의 문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 바실리카라는 명칭이 나타나 있는데, 다수의 사람을 수용하는 커다란 홀, 혹은 로마 주택에서 열주가 있는 큰 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대체로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특정한 건축 유형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서 제단을 향해 직통할 수 있는 공간 질서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회당부를 갖춘 바실리카는 중세를 지나면서 성당 형식의 기조를 이루었고, 훗날 로마네스크, 고딕, 나아가서 근세 교회당 건축의 기본을 이루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유서 깊은 주요한 교회당에 바실리카라는 호칭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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