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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정동교회의 양식과 역사

by 프리아키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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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서울 중구 정동 34-3번지. 1977년 11월 22일에 사적 제256호로 지정. 1895년 9월에 착공, 1897년 10월에 준공되었으며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평한 천장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항식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물론 이런 식의 백과사전 유형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실생활에서 내가 보고 부딪히며 겪는 그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평소 개인적인 일로 중구 쪽에 가게 되면 덕수궁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던, “매우 낡은” 건물로만 인식되었던 이 건물이 이렇게 귀중한 건축물이었을 줄이야. 자세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보면서 이 건물에 대해 꽤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앞에서 대략적인 역사나 구조에 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다른 것들도 조금 설명하자면, 정동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 건물로 현존하는 유일한 19세기의 교회 건축이며,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 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 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석조의 기단은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모습이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이 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와 함께 건물이 전체적으로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 건물이다. 또한, 교회의 남쪽 모서리에 붙여 세워진 종탑은 평탄 형식으로 층고가 높게 처리된 교회 건물과 좋은 비례를 이루고 있다. 

천주교보다 150년 늦은 1884년 개신교가 우리 땅에 처음 소개되었다. 1882년 서상윤과 몇몇 조선인은 만주에서 서양인 목사를 도와 누가복음서를, 1883년에는 요한복음서를 간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1884년에 서상윤은 이 복음서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황해도 솔 내에서 전도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시작점이다. 1885년에는 우리나라 교육계와 기독교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인천을 통해 입국하였다. 기독교 전파와 교육사업을 목표로 한 이들은 정동을 주요 활동무대가 삼았다. 언더우드는 1887년 정도 13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인 한옥 사랑채에서 첫 예배를 봤으며, 1910년 신문로1가에 신축한 새문안교회로 이전했고, 그가 설립한 교육기관이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이다.

아펜젤러 역시 1885년에는 한옥을 구입한 후 방을 나누어 남녀를 구분해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곳을 베젤 예배당이라 하였다. 그 후 아펜젤러는 1887년 정도 37번지 일대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한옥을 개조해 감리교 교회당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이 우리 땅에 전파된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이다. 이후 출석 신도가 200명을 넘어서자 새 교회당을 신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정동교회이다. 설계자가 일본인으로만 알려진 이 건물은 500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연면적 110평 규모로, 1895년 9월 정초식을 한 뒤 1897년 10월에 완공되었다.

1910년대 후반에는 정동교회도 여러 변화를 겪는다. 남녀의 예배 공간을 구분했던 휘장을 걷어내고 마루에 예배용 의자를 들여놓았다. 성격 역시 학생 교회에서 양반을 흡수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1917년에는 수가 많이 는 신도를 모두 수용하고자 건물의 증개축이 거론되었다. 1922년에 교회당 증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1926년에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된다. 이때의 증축은 돌출된 현관 부와 종탑 부 사이의 공간인 몸체부의 양 측면을 넓혀 삼항식 평면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연면적이 175평으로 늘어났다.

6·25 때 전화로 인하여 교회의 일부가 부서지고, 폭격으로 예배당 강대 쪽이 폭파되면서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다. 1953년 말에 중수를 통하여 거의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1977년에 문화공보부가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함에 따라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이 문화재 예배당을 비켜서 그 뒤에 지었다. 그리하여 현재 교회 구내에는 교회의 역사와 성장에 따라 신·구건물이 대비적으로 병존하고 있다. 연건평 1,100평에 달하는 현대식 교회 건물을 1977년 11월 6일에 기공하여 1979년 4월 15일에 봉헌하였다. 1980년 10월에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 건물이 예전부터 유명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나와 같이 평소에 지나치는 사람 중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하는 이 건물은 그만큼 익숙하고 푸근한 맛이 있다. 친한 친구일수록 더 알고 싶은 것처럼. 소박함 속에 세월의 무게를 감추고 우리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정동교회에 혹여나 자꾸 빠지게 되지 않을까 조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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